우리 아이가 역사를 어려워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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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운영자 작성일 : 15-06-16 14:09
조회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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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르본연사연구소입니다.
역사가 어렵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란 과거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니 옛날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역사가 어렵다면 배우는 과정이나 독서 습관을 고침으로써 얼마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음, 우선 역대 왕들 중 오래 산 분을 보면 한 일도 많아요.
그중 영조처럼 오래 살지는 않았어도 우리에게 성군으로 불리는 정조를 한 번 예로 들어볼게요.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고, 또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부분이니까요.
자, 정조 시리즈 들어갑니다.
정조, 즉위하자마자 일갈합니다.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제 노론들은 죽었다 싶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욱 흘러내립니다.
연산군 시절이 생각났거든요.
그런데 정조의 다음 행보가 전혀 뜻밖입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원수들임에도 노론들을 그냥 놔둡니다.
대신 노론들의 등쌀에 떠밀려 한직에 머물고 있던 채제공, 정약용 등 남인들을 등용해요.
그리고 자신을 굳건히 지켜줄 호위병들을 뽑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장용영.
정조의 거침없는 행보에도 노론들은 별다른 불만을 터뜨리지 않아요.
죽은 줄 알았는데 그저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니 왕이 무슨 일을 하든 지켜만 봅니다.
노론들의 이런 사정을 제대로 꿰뚫은 정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착착 진행합니다.
당시 조선 궁궐을 지키던 수비병은 대략 잡아 약 5천 명.
정조 또한 5천 명을 뽑아 철저하게 훈련시킵니다.
정조의 다음 행보는 서얼금고법, 이른바 서자들이 벼슬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던 법을 철폐해 버립니다.
앞서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하면서 점찍어 두었던 인물들을 대거 등용시키기 위해서였죠.
서얼, 즉 서자들은 참 아는 게 많았어요. 아버지는 대개 양반들이어서 어려서 글을 배웠지만
밑바닥 인생을 면할 수가 없으니 세상의 풍파를 한몸에 겪지 않았겠어요?
그러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백성들이 무엇 때문에 고통받는지 몸소 체험으로 터득했던 인물들이었죠.
이리하여 박지원의 제자였던 박제가, 유등공, 홍대용 등 서자들이 중앙 정계에 등장한 거예요.
그런데 이분들의 면면을 살펴 보면 어디선가 상업 냄새가 나지 않나요? 네 이들은 정부 주도로 상업을
육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거예요. 비록 서얼 출신이라 하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훤회 꿰뚫고 있는 분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정조는 이제까지 시전상인들이 세금 좀 낸다고 난전들을 못살게 굴던 금난전권을 전격적으로 폐지해 버립니다.
자, 정조는 이렇게 좌로는 농업을 육성시키기 위해 정약용을,
우로는 박제가를 등용하여 농업과 상업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합니다.
든든한 호위병도 있겠다, 나라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겠다. 정조는 또 다른 일을 벌입니다.
정조를 설명할 때 화성을 빼놓을 수 없겠죠?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니까요.
그만큼 정조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자 했던 숙원 사업이 바로 화성에 담겨 있답니다.
역사상 왕들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면 백성들은 아이고 이제 죽었다 싶어 도망가거나 꼭꼭 숨어버렸죠.
고려 시대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를 위해 영전을 짓느라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일 때도,
이성계가 한양을 건설할 때도 광해군이 궁궐을 지을 때도 백성들은 하나같이 나라에서 뭔 공사만 벌였다 하면 한숨부터 쉬었어요.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장인들이 차출되고, 백성들이 동원되어 돌, 나무 등을 날라야 하고 기반도 닦아야 하죠. 그런데 밥은 먹고 일해야 하는데, 나라 일을 해도 먹을 것은 백성들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이거 미칠 노릇이었죠.
농사만 지어도 먹고 살기 힘든 판에 먹을 거 싸들고 노역장에 나가자니 굶어죽기 딱인 거죠.
그러니 도망칠 밖에요.
그렇지만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는 데 신하들은 대놓고 거세게 반대하지는 않아요. 심지어 노론들조차.
이윽고 공사가 시작되자 백성들은 사돈의 팔촌까지 데리고 공사장으로 몰려들어요.
자, 바로 여기에 정조만의 국정 운영의 비밀이 숨어 있어요.
우선 화성 북문쪽, 지금의 장안구에 해당하네요. 이곳은 예부터 농사짓기가 매우 불편했어요.
가뭄이라도 심하게 들면 농사를 포기해야 하는 황무지나 다름없었죠.
이때 정조는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는 곳을 개간하려 해요. 이를 위해 먼저 만석거라는 농업용 저수지를 건설합니다.
오늘날 수원 만석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 호수가 바로 당시 건설된 저수지 만석거랍니다.
그리고 근처 황무지를 개간해 수확한 곡식을 동원된 백성들에게 배분합니다.
물론 화성을 건설한 백성들에게도 월급으로 곡식을 준 거죠. 그러니 백성들이 사돈의 팔촌까지 끌어올 밖에요.
그러니 최초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던 화성이 불과 34개월 만에 완공된 거예요.
이윽고 정조는 당대 최고의 과학 기술을 동원해 완공한 화성에 친위부대 장용영 군사들을 배치시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비용도 황무지에서 개간한 것으로 일부를 충당했던 것입니다.
정조의 다음 행보는 아는 것처럼 화성행차에 있습니다.
왕이 행차를 하게 되면 먹는 것, 의식, 대동하는 군사들, 또 백성들까지 동원하는 엄청난 일이었어요.
더욱이 한 번도 아니고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무려 66차례나 되었으니 이쯤이면 고달플만도 한데 모두가 좋아해요.
왕이 그토록 화려한 행차를 하는데도 장안의 온 백성들이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으니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네, 여기에 정조만의 국정 운영의 비밀이 또 하나 드러납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바로 격쟁의 장, 축제의 장이었던 거예요.
행차 도중 길가에 주욱 늘어선 백성들, 그들 중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나라에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경우
꽹과리를 치고 말을 합니다. 멀리 대궐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관리가 그 내용을 상세히 적었고, 정조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맨 먼저 그것부터 처리하였어요.
지금도 민원이 처리되는 데 3일 정도 걸리는데, 당시에 불과 3일이면 처리되었으니 그야말로 속전속결인 셈이죠.
화려한 왕의 행차는 별다른 놀이가 없었던 당시에 좋은 구경거리도 마련해 주었고,
또 수시로 과거시험을 보아 그 지역의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니 이쯤하면 백성들이 춤을 출만하죠.
그래서 정조는 행차 때마다 가는 길을 달리 했던 것입니다.
정조의 행보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 생략(이후는 소르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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